
솔직히 저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제가 미니멀리스트 체질인 줄 알았습니다. 20평 신혼집에서는 뭘 살 공간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30평대로 이사하고, 아이가 생기고, 팬트리장까지 딸린 집으로 한 번 더 이사하면서 주방은 어느새 저도 모르는 물건들의 집합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집게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이사 때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정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납 효율을 갉아먹는 것들, 직접 꺼내보니
저도 처음에는 주방이 복잡한 이유가 단순히 물건이 많아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리를 시작하고 나서야 진짜 원인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물건의 수가 아니라 '언젠가는 쓰겠지'라는 마음으로 붙들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냉동실부터 열었는데, 이게 충격이었습니다. 돌잔치에서 받아온 떡, 먹다 남긴 케이크 조각, 진공포장도 안 된 채 방치된 고기 조각이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공포장이란 식품에서 공기를 제거해 밀봉하는 방식으로, 산화와 세균 번식을 막아 냉동 보관 기간을 크게 늘려주는 방법입니다. 이 처리가 안 된 채 3개월 이상 냉동된 식품은 냉동 번(freezer burn), 즉 수분이 빠져나가 식감과 맛이 크게 저하된 상태가 되는데, 솔직히 이 상태의 음식을 다시 꺼내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아이스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접 산 것은 하나도 없는데 냉동실 한 칸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세어봤더니 17개였습니다. 냉매제(아이스팩 내부 충전재)의 성분은 대부분 고흡수성 수지(SAP, Super Absorbent Polymer)로, 여기서 SAP란 자기 무게의 수백 배에 달하는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고분자 물질을 말합니다. 이 성분은 일반 쓰레기로 버리기도 애매해서 쌓아두다 보니 냉동실 수납 효율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실사용에 필요한 두세 개만 남기고 전부 분리배출 처리했습니다.
서랍을 열었을 때 나온 물건들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밤 까는 전용 칼, 게 먹는 포크, 배스킨라빈스 전용 수저, 케이크칼, 한 번도 쓰지 않은 케이크 초까지. 이런 단일 기능 도구(single-use tool)들은 말 그대로 한 가지 용도 외에는 활용이 불가능한 주방 도구를 뜻하는데, 제 경험상 이런 물건들은 대부분 다른 도구로 충분히 대체가 됩니다. 케이크는 일반 과도로도 자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은 집에 있는 디저트 스푼으로 먹으면 됩니다.
주방 수납 효율(storage efficiency)이란 수납 공간 대비 실제로 사용되는 물건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이 수치가 낮을수록 공간은 넓어도 필요한 물건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제가 정리를 끝내고 나서 체감한 변화는 단순히 공간이 넓어진 게 아니라, 필요한 물건이 바로 손에 잡힌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정리에서 버리거나 정리한 물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냉동실: 진공포장 안 된 채 3개월 이상 방치된 식품, 돌잔치·행사 떡, 케이크 조각
- 냉장고: 배달 음식에서 쌓인 일회용 소스(간장, 케첩, 머스타드), 한두 번 쓰고 방치된 샐러드 드레싱과 치킨 스톡
- 냉동실 공간: 아이스팩 17개 중 15개
- 서랍: 단일 기능 도구들, 배달 일회용 나무젓가락과 수저, 케이크칼과 케이크 초
- 수납장: 세트가 맞지 않는 그릇과 컵, 뚜껑 없는 반찬통, 아이들 유아기 식기류
미니멀 살림과 소비 습관, 이사하면서 깨달은 것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사할 때 "비운다"고 했던 것들이 새 집의 팬트리장 앞에서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팬트리장(pantry)이란 주방 옆에 딸린 별도의 수납 공간으로, 식료품이나 주방 용품을 보관하는 곳인데, 공간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물건으로 채우려는 심리가 작동합니다.
정리를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물건을 아끼는 것과 구매를 줄이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물건을 버리지 않으면서 아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물건들 대부분은 처음 구매할 때 이미 돈이 나간 것들이었습니다. 안 쓰는 물건을 보관하는 건 아끼는 게 아니라 공간 낭비고, 정작 있는지 몰라서 같은 걸 또 사는 비용이 더 크다는 걸 직접 겪어보니 실감이 났습니다.
실제로 소비 과잉 현상은 개인의 의지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불필요한 충동구매 비율이 전체 소비의 20~30%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주방 용품처럼 저단가·소량 품목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출처: 한국소비자원). 다이소 제품처럼 저렴한 물건일수록 "이미 집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구매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또 하나 정리하면서 좋았던 방법은 중고 나눔입니다. 버리기엔 상태가 멀쩡한데 제가 쓰지 않는 물건들은 중고 플랫폼을 통해 나눔으로 처리했습니다. 특히 아이 유아기 식기류처럼 감정이 담긴 물건은 버리기가 참 망설여지는데,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나눔을 하니 훨씬 마음이 편했습니다. 환경부에서도 불필요한 폐기물 발생을 줄이기 위해 재사용·나눔 문화를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출처: 환경부).
버리기가 정말 어려운 물건은 억지로 버리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부장 가장 위칸이나 하부장 가장 안쪽처럼 손이 닿지 않는 공간에 모아두고, 6개월에서 1년 뒤에도 꺼낸 적이 없다면 그때 버리는 방법도 효과적입니다. 저도 이 방법을 써봤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 내가 이걸 가지고 있었지"라는 생각조차 안 나는 물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번 정리를 마치고 나서 달라진 소비 습관이 몇 가지 생겼습니다. 배달 주문 시 일회용 수저와 포크는 무조건 필요 없음으로 표시하고, 돌잔치나 행사에서 음식을 챙겨올 때는 그 자리에서 다 먹지 못하면 가져오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오는 순간 냉동실에서 잠드는 게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방 정리는 단 한 번의 대청소가 아니라 물건을 들이는 습관부터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저처럼 이사를 몇 번 하면서도 계속 쌓여가는 주방 때문에 답답하셨다면, 오늘 냉동실 한 칸부터 열어보시길 권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 주방 정리에서만큼은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